이성계는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만호라는 관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5년이였던 1356년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 공격을 할 당시에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을 도와 원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5년 후 이자춘이 사망하자 이자춘의 벼슬을 이성계가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 / 동북면상만호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1361년 홍건적이 20만명의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여 수도를 함락하자 이성계는 2천명의 기병을 일으켜 고려 수도 탈환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듬해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또 한번 수만명의 군사를 통해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침략하자 고려는 이성계를 출격시켜 방어를 하게 합니다. 이후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게 됩니다. 이성계는 이러한 왜구 역시 차례로 격파하며 고려 조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후 왕위에 즉위한 이성계는 고려와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고, 개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뜻이 일치한 개혁파 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르게 됩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이념을 계승한 국가라는 뜻으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관점의 통치이념을 세웧고, 중농억상을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유교를 숭배하는 정책을 펴게됩니다. 또한 고려의 색을 빼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집권층의 근거지로 한양을 삼게되었고, 지리적으로도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조세수취나 당시 물류를 집중시키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였습니다. 한편 정도전은 노비 출신이였던 본인의 과거 때문인지 신분제를 폐지하고 과전법을 추구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와 재상중심정치를 꿈꾸었던 인물이였습니다. 과거 고려시절 충숙왕, 충선왕 등 국사를 등한시한 국왕들의 행태를 보면, 국왕이 무능할 수도 있으며, 국왕을 잘못 뽑으면 국가가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존재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니, 왕을 견제하는 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같은 생각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였습니다. 그는 재상 중심적 정치제체를 기본으로 하여 모든 정책은 도평의사사에서 심의하고 시행하게끔 하였습니다. 한편 이성계에게는 왕자의 난도 있었는데, 이성계의 첫째 부인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을 했던 향처였습니다. 이 향처 사이에서 이방원과 형제들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향처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두번째 부인으로 경처를 맞이하게 됩니다. 경처는 내심 본인의 아들을 세자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이성계가 경처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이방원은 1398년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과 정처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정종을 즉위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무인정사입니다. 하지만 정종 허수아비였고, 실제 모든 권력은 이방원에게 있었습니다. 2년 뒤 이방원은 다시 한번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이방원과 이방원의 넷째형이였던 이방간 사이의 권력싸움이였습니다. 이 난을 방간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방원은 방간의 난도 제압하여 모든 권력을 지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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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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