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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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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여러 호걸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견훤입니다. 891년 완산주의 작은 군웅이였던 견훤은 세력을 키워 이듬해에는 가장 강력한 군웅이 되어 순식간에 호남지역을 평정하고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게 됩니다. 삼국유사 제2기이 후백제 견훤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견훤이 태어났을 때, 들에서 밖을 갈고 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기 위해 어머니가 포대기에 싸서 잠시 수풀에 내려놓았는데, 호랑이가 와서는 젖을 먹였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기개가 있어 범상치 않았다. 성장하여 군인이 되어 서남해변에서 변방을 지키는 일을 하였는데 그의 기상은 항상 사졸보다 크고 늘 모범이 되었다. 이에 비장(소규모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자개입니다. 고려사에서는 918년 8월 상주의 아자개가 후백제가 아닌 고려에 투항했다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때 고려가 아자개를 인정하고 대우했던 것을 보면, 당시 아자개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아자개가 후백제가 아닌 고려에 투항한 것을 고려사에서는 아자개가 견훤의 부친이 아닌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견훤전에는 견훤이 15세가 되던 881년 집을 나와 군인이 되었다고 되어있는데, 881년은 아자개가 군웅이 되기 전이며, 기록에 따르면 아자개는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2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상원부인은 견훤과 능애를 낳았고, 남원부인은 용개, 보개, 소개와 딸 대주도금을 낳았다고 합니다. 견훤은 군인이 되어 서남해지역에서의 무공으로 비장에 오르게 됩니다. 바장이 된 견훤은 삼한이 혼란한 틈을 타 완산주의 군웅으로 등극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견훤이 군사를 일으킨 시기가 892년 또는 889년 이라고하고 있는데, 889년에 견훤이 완산주의 군웅이 되고,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했다고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견훤의 근원지가 무진주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완산의 도적 견훤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부분을 살펴보면, "완산의 도적 견훤이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 후백제라 칭하였는데 무주 동남쪽 지방의 군과 현이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견훤편에는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인 892년은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인데,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아이들이 왕의 최측근으로서 권력을 악용하여 마음대로 휘두르니 기강이 매우 문란하였다. 거기에 기근까지 더해지닌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고, 도적떼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견훤은 세력을 집결시켜 왕경의 서남쪽 주와 현을 차례대로 공격하였다. 당시 견훤의 인기는 대단하여 가는 곳마다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 보름 사이에 5천명에 달하는 무리로 커졌다. 무진주를 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 도독전무공둥주군사 행정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고 하였다." 군인에서 완산의 도적이 된 견훤은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까지 진격하게 되고, 결국 무진주를 접수하며 스스로 왕이라 칭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무주 동남쪽 군현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고 나오는데, 이 세력은 순천의 호족 박영규인것으로 추정됩니다. 견훤은 박영규를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만들면서 신라 서남방의 지배자가 됩니다. 서남방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견훤은 스스로를 전주, 무주, 공주의 도독이라 칭하였습니다. 이로써 견훤은 할거 세력 중 가장 강력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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